김덕배전 -2
2. 존재의 흔함과 진귀 사이에서
다음날 일찍 침소에서 몸을 빼낸 김덕배는 어제의 그 절벽에 앉아 먼 하늘을 바라보았다. 한 시진(時辰)이 지날 때 쯤 다시금 노인이 나타났다.
「허허… 아직 그대에겐 우환이 남아있는 듯 허이」
노인의 목소리에 김덕배는 그쪽으로 고쳐 앉았다.
「그렇소이다. 밤새 고심해 보건데, 여전히 걱정이 남아 떠날 수 없었소.」
노인은 빙그레 웃었다.
「그래, 그 걱정이란 무엇이오?」
「어젯밤에 많은 고민을 해 보았소. 노존(老尊)께서 하신 말씀은 삶의 새 시작점을 굽어 살펴보게 해 주었소이다. 하지만 그 다음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지 곰곰이 생각해보니, 자못 의구심이 들더이다. 도대체 나는 무엇을 어찌 해야 한단 말이오?」
노인은 태연하게 받았다.
「그대는 크게는 농사를 지을 수 있고 글공부도 할 수 있소. 그리고 작게는 맑은 공기를 취할 수도 있고 나와 허리춤을 잡고 씨름 할 수도 있을 거외다.」
김덕배는 답답했다.
「내가 묻는 게 그러한 종류의 것이 아님을 알고 있잖소? 나는 이 땅의 수많은 사람들 중 하나일 뿐이오. 너무도 하찮은 일부라서 먼지와도 같소. 하지만 지금의 나라꼴을 보시오. 임금은 나이가 찼음에도 우둔하여 똥오줌 분간을 못하는데 내신들은 그를 이용해 개인의 탐욕 채우기에 급급하오. 그리고 동서남북 곳곳에서는 외세의 침입소식이 끊이지 않고 있는데 안으로는 민란까지 빈번하게 발생하니, 이는 설령 백만대군이 있고 제갈공명과 강태공이 있어도 잠재울 수 없는 것처럼 보이오. 이 가운데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게 어찌 대단하겠소? 세상은 너무도 거대하고, 나는 하찮고 힘없는 사람일 뿐이외다!」
그에 노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소. 그대가 아무리 애쓴들 당장의 큰 정세는 바뀌지 않을 것이오.」
김덕배는 실망스러웠다.
「노존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니 더 이상 희망이 없소.」
그 말에 노인은 천천히 김덕배에게 다가가며 말했다.
「하지만 그것이 희망을 집어삼키진 못 할 거요.」
노인은 김덕배의 왼쪽 가슴팍에 손을 얹었다.
「지금 이곳에 뛰고 있는 게 뭐겠소?」
「그야 물론 심장이오.」
노인은 웃으며 말했다.
「그래. 바로 그렇다오. 지금 이곳에 그대의 심장이 뛰고 있소. 아니, 심장이 요동치고 있소. 그리고 그것은 그대가 존재함을 증명해보이고 있소! 그렇다면 그대가 할 수 있는 일이 넘쳐나고 있지 않겠소? 그대는 재능으로 충만한 사람이오.」
노인은 손을 떼고 절벽 쪽으로 걸어갔다. 절벽 너머에는 거산(巨山)이 원근에 따라 크고 작게 펼쳐져 있었다.
「눈을 감아 보시오. 그리고 생각해보시오. 그대만이 할 수 있는 일들에 대해 말이오. 이는 그대가 몇 만 분의 일의 사람이 아닌, 그대가 그대로서 가장 그대다운 존재가 되게끔 이끌어 줄 거요. 물론 한순간 세상을 뿌리 뽑을만한 대단한 힘이 그대에게 있는 것은 아니오. 하지만 그대라면 누구도 해내지 못할 이상(理想)의 단초를 제공해줄 거요. 그는 매우 독특하고 획기적인 힘일 것이외다. 후에 사람들은 그대를 칭송해 마지않을 것이며, 시인들은 그대에 대한 기억을 영원의 언어로 낭송해줄 거요.」
노인은 껄껄거리며 오솔길로 걸어 나갔다.
「그대는 그저 확신하는 일에 대해 최선을 다 하시오. 각자에게 주어지는 재능에서의 최선은 최고 외에 없는 법이오.」
그 말에 김덕배는 잠깐 고민에 빠진 듯 먼 허공을 응시했다. 그리고 정신을 차려 무언가를 말하려 할 때에 노인은 어디에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