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계에 가까운 사람, 사람에 가까운 기계
영화 이미테이션 게임(The Imitation Game) /
결혼하는 것은 좋다. 그러면 당신은 후회할 것이다. 결혼하지 않는 것은 좋다. 그래도 역시 당신은 후회할 것이다. 어느 쪽이든 후회할 것이다. 여자를 믿은 것이 좋으냐 믿지 않는 것이 좋으냐, 어느 것을 선택하든 당신은 후회할 것이다. 세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어리석은 일을 보고 웃는 것이 좋으냐 우는 것이 좋으냐, 어느 것을 선택하든 당신은 후회할 것이다. 목매어 자살하라, 그대는 그것을 후회할 것이다. 목매어 자살하지 마라, 그대는 또 그것도 후회할 것이다
생의 대립되는 선택 상황에 있어서 무엇인가를 선택한 후의 상태는 영원일 수 없다. 왜냐하면 참다운 영원은 이것이냐 저것이냐의 뒤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앞에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뒤에 있는 사람들은 이 중 후회해야 하므로 영원은 일종의 괴로운 시간적 결과에 불과하다.
- 키에르케고르 저서 <이것이냐 저것이냐> 중
#글에는 스포요소가 다수 포함돼 있습니다. 영화를 아직 안 보셨다면 감상 후 보시길 권합니다.
영화 <Imitation Game>은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의 통신암호 ‘에니그마’를 해독하는 데에 결정적 실마리를 제공한 영국의 수학자 앨런 튜링의 삶을 각색한 작품이다. ‘인류행복의 최대공약수를 산출해 소를 희생하고 대를 취한다’ 그가 참여한 의뭉스러운 프로젝트는 누구나 한번쯤 빠지는 ‘공리’에 관한 고민을 여실히 담아내고 있다. 이것이냐 저것이냐, 무엇을 선택하든 필연적으로 직면할 수밖에 없는 비극에 관한 솔직한 이야기다. 또한 컴퓨터의 모체가 된 그의 발명품 ‘튜링 머신’은 과학기술의 발전과 함께 맞닥뜨리는 인간과 기계 사이의 애매한 경계를 꼬집고 있다.
※사진 출처 : 네이버영화 스틸컷
£최적화된 행복과 상대적 박탈감
-다수를 위한 소수의 희생
영화관을 나오며 내 머릿속을 차지한 화두는 공리주의에 관한 쟁론이었다. 몇 년 전 이슈가 된 마이클 센델의 <정의란 무엇인가>를 읽을 때 느낀 고민 중 하나가 그대로 재현된 셈인데, 늘 그렇듯 참 머리 아픈 주제다.
영화에서 주인공 튜링은 독일군이 군사기밀을 암호화한 에니그마를 해독하는 데 성공하지만, 그를 활용하는 데 있어서 공리적 방법론을 선택한다. 전쟁의 실마리를 풀 열쇠를 쥔 그는 철저한 논리와 통계에 근거해 ‘행복의 최대 공약수’를 도출한다.
생명을 담보로 한 그의 논리는 이상하리만치 냉철했다. 마치 어떤 문제를 기계에 넣어 값을 뽑아낸 느낌이랄까. 튜링은 한 번의 전투에서 승리를 만끽하기보다 전쟁의 종결을 위한 희생을 선택한다. 그의 논리는 대사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모든 감정을 억제하고 논리와 이성으로 생각해야 한다. 분명한 사실은 우리가 이 전쟁을 끝내야 한다는 것이다”
매순간 세 명이 목숨을 잃는 미증유의 유혈사태 속에서 그들이 할 수 있는 선택은 사실 제한적이었다. 때론 팀원인 피터 힐튼의 형이 참여한 전투마저 방관하는 결단을 내려야만 했지만, 결과적으로 종전을 2년 앞당기고 1400만명의 목숨을 구했다. 그리고 폐허가 된 땅 위에서 사람들은 제자리를 찾아 마음 밭에 희망을 심을 수 있었다. 나름의 해피엔딩이다.
그럼에도 이를 놓고 흔히 찝찝함을 느끼는 이유는 선택이 가져오는 상대적 절망 내지 박탈감 때문이다. ‘어쨌든 살 사람은 살았고 죽을 사람은 죽었다’, ‘어쩔 수 없지 않았느냐’ 이 논리만큼 슬픈 것도 사실 없다.
어떻든 죽음을 피할 순 없었다. 다만 선택에 따라 더 많은 생명을 살렸고, 죽음을 맞아야 할 그룹이 달라졌다. 사실 개인적인 감정을 투영해서는 풀지 못할 문제다. 중요한 것은 비극 이후에 다시는 그와 같은 절망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하는 치열한 고민과 결단이 있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가장 기계에 가까운 사람, 가장 사람에 근접한 기계
필자는 영화를 보기 전까지 ‘이미테이션 게임’이 갖는 의미를 잘 몰랐다. 영화가 끝나고 이 블로그를 제작한 개발자에게 설명을 듣고 나서야 그 의미를 조금이나마 해득할 수 있었다.
Imitation game, 한글로 단순 직역하면 ‘모방 게임’이다. 즉, 누가 진짜이고 누가 모방인지를 판별하여 맞추는 게임이다. 하지만 모방이란 진짜와 가짜를 ‘제대로’ 구분할 수 있을 때 유효하다. 만약 가짜가 진짜와 꼭 같거나 혹 진짜보다 더 그럴 듯한 행동과 생각을 한다면, 모방은 모방이 아니게 된다.
앨런 튜링이 착안한 이 게임은 사람과 기계 사이에 그어진 경계가 허물어질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 그가 개발한 ‘튜링 머신’이 이후 컴퓨터 인공지능의 모태가 됐다는 데서 그 의미가 더해진다.
영화에서 묘사하는 튜링은 사실 컴퓨터에 가까웠다. 거짓말을 못 하는 성격, 감정을 잘라낸 추론과 결단. 그가 유년시절 왕따로 겪은 고통은 주변 사람과의 소통을 더디게 했고, 다만 ‘답’만을 끝없이 추구하는 천재 수학자로 만들었다. 의도를 숨긴 사람들의 말과 암호가 다를 게 없다고 말하는 그에게 있어서 소통이란 그저 기계적인 것이었다. 오히려 기계와 함께하는 시간이 더 익숙하고, 팀원보다 해독기 ‘크리스토퍼’를 신뢰했다. 동성애자임에도 조안과 약혼할 수 있었던 것 또한 그녀의 능력을 필요로 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괴이한 행보를 이어온 그이지만, 또한 그랬기에 ‘풀 수 없는’ 암호를 풀었다. “생각지도 못한 누군가가 누구도 생각지 못한 일을 해낸다” 유년시절의 친구 크리스토퍼와 약혼녀 조안이 한 이 말은 정확히 튜링을 가리키고 있다. 그의 기계적인 삶은 역설적이게도 인간적이고 유익했다.
그러나 결국 그는 홀로였다. 말년엔 괴로운 시간을 보내다가 동성애자란 죄목으로 화학적 거세를 당하고 자살까지 한다. 영화에서 홀로 남겨진 그가 흐느끼는 장면은 마치 “튜링이야말로 가장 인간다운 삶을 산 사람”이라고 말하는 듯 했다.
개인적으로 동성애에 동의하진 않지만, 그가 삶 전반에서 받은 억압은 비본래적인 것이었다. 아니, 그는 동성애라는 차별과 무관한 더 큰 억압과 싸우고 있었다. 정치적 의심을 받는 가운데 튜링은 말한다. “저는 단지 수학자일 뿐입니다. 폭력이나 정치에 관심이 없죠” 그는 홀로 서 있었기에 빛났고, 또한 위대한 업적을 남길 수 있었다. 자신 외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었기에 더 큰 의미를 획득할 수 있었다. 컴퓨터를 닮은 사람이 비인간적일 수만은 없다는 영화의 역설적 외침 속에서 ‘imitation game’이란 제목이 함의하는 바를 다시 생각해보게 된다.
£영화 vs 실제
-영화에서 각색된 사실들
-튜링 수사를 담당한 형사 노버트 로크는 이야기진행 상 삽입 된 가상의 인물이다.
-앨런 튜링은 실제로 소련 스파이로 의심받은 적이 없다. 영화에서는 소련 스파이로 의심받다가 우연히 동성애자로 밝혀진 것으로 묘사되지만, 실제로는 튜링과 동성애 관계를 맺던 아놀드 머레이라는 소년이 그의 친구와 튜링의 집을 털다가 경찰조사를 받게 돼 동성애가 밝혀진다.
-‘에니그마 해독 프로젝트’에 참여했던 소련 스파이 존 캐언크로스는 실제로 튜링과 함께 일한 적이 없다.
-‘튜링 머신’의 근간이 되는 기계 ‘크리스토퍼’의 실제 이름은 봄브(Bombe)다.
-튜링은 에니그마 해독을 위한 기계를 혼자서 고안해내지 않았다. 영화에서 언급되지 않은 고든 웰치맨(Gordon Welchman)이란 인물과 함께했다.
-튜링의 죽음에는 논란이 있으나 독사과를 먹고 자살했다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그 외에도 실수로 시안화 가스를 마시고 죽었다는 추측도 있다.
-극중 튜링의 결단으로 형제의 죽음을 목도해야 했던 피터 힐튼에게는 형제가 없었다. 실제로 힐튼은 ‘크리스토퍼’가 완성된 뒤 팀에 합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