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의 죽음에 애써 무관심하려 했던 아버지의 방황과 고뇌
영화 러덜리스(rudderless)
‘러덜리스(rudderless)’는 단어 그대로 배의 키 내지는 방향타가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이는 혼란, 통제불능, 방향감각 상실 등의 의미로 다가오지만, 또한 파도치는 그대로, 바람이 부는 대로 가는 무던한 상태이기도 합니다. 영화 속 주인공인 샘이 견디기 힘든 아픔을 대면한 상황에서 취한 태도가 바로 이 ‘rudderless’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 영화이야기 (※강력한 스포에 주의해주시기 바랍니다)
여느 때와 같은 화창한 날, 아들인 조쉬와 일상적인 통화를 마친 샘은 약속장소에서 아들이 오기를 기다립니다. 시간이 되어도 아들이 오지 않지만 샘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합니다. ‘나를 바람맞히다니’라는 익살스런 말로 소소하게 상황을 즐깁니다. 그러던 중 식당TV에 자신의 아들이 다니는 고등학교에서 총기난사 사고가 났다는 뜻밖의 브레이크뉴스를 접합니다.
총을 쏜 피의자는 다름 아닌 조쉬였습니다. 평소 전혀 낌새를 눈치 채지 못했던 샘은 큰 충격에 휩싸입니다. 조쉬를 포함한 7명이 목숨을 잃고, 사건은 지역사회에 큰 파장을 일으킵니다. 잘 나가는 광고 기획자였던 샘 또한 절망적인 실의에 빠지고, 한 호숫가에 매어 놓은 요트에서 부랑을 시작합니다.
2년 후, 공사현장에서 페인트칠을 하며 하루하루를 연명하던 샘은 아마추어 뮤지션이 모이는 한 클럽을 찾습니다. 과거 뮤지션의 꿈을 꿨던 샘은 이윽고 통기타를 들고 무대에 오릅니다. 그리고 그의 노래에서 특별한 매력을 느낀 소심한 청년 쿠엔틴은 샘에게 그룹사운드를 하자고 제안합니다.
거듭 거절의 의사를 밝히지만 끈질긴 쿠엔틴의 노력에 결국 밴드를 하게 됩니다. 뜻밖의 시작이었지만 조금씩 화음을 맞춰나가며 구색이 갖춰집니다. 이어 기타, 베이스, 드럼이 합류하며 ‘rudderless’라는 밴드가 결성됩니다.
샘이 내놓은 감미로운 노래에 관중들의 반응은 가히 폭발적입니다. 고작 서너명의 관중이 전부였던 클럽에는 어느덧 콘서트장을 방불케하는 인파가 몰립니다.
인기가 치솟으며 정식 무대에서 데뷔할 기회를 얻게 된 러덜리스. 그러나 무대공연을 앞두고 지금까지 사랑받은 곡들이 총기를 난사한 샘의 아들이 작곡한 노래라는 사실이 밝혀집니다.
멘붕에 빠진 러덜리스 멤버들. 성공적인 뮤지션을 꿈꿨던 쿠엔틴이었지만, 이대로 무대에 설 수 없다며 결국 자리를 떠납니다. 그리고 의욕을 상실한 쿠엔틴은 자신이 사용하던 기타를 시장에 내놓으며 뮤지션의 꿈을 포기하기에 이릅니다.
“포기하는 자는 이길 수 없어”
아르바이트를 하던 쿠엔틴을 찾은 샘이 남긴 말입니다. 그는 쿠엔틴에게 진심어린 사과와 함께 평소 쿠엔틴이 꿈에 그렸던 고액의 기타를 건넵니다. 그 기타는 샘의 거처였던 보트를 팔아 마련한 것이었습니다.
처음 무대에 섰던 클럽을 다시 찾은 샘. 조촐한 대중 앞에서 그는 고백합니다.
“제 아들의 이름은 조쉬입니다. 2년 전 제 아들이 6명의 아이들을 총으로 쏴 죽였습니다. 이 곡은 그 아이가 쓴 곡입니다.”
충격적인 말에 관중들의 눈이 휘둥그레집니다. 샘은 개의치 않고 읖조리듯 마지막 곡 「Sing Along」을 부릅니다.
“I wish you were here to sing along. my son.. my son..”
■ 사랑하는 아들을 떠나보내는 방법
조쉬의 죽음은 부모 된 입장에서 가슴에 두 개의 못을 박는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외동아들이 죽었는데 그 묘비에 ‘살인자’라는 낙서가 사라지는 날이 없으니 아마도 부모 가슴을 긁고 지나간 상처가 여무는 날이 오긴 힘들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런데 아들의 죽음을 놓고, 아버지와 어머니의 반응은 달랐습니다. 조쉬의 어머니인 에밀리는 자식이 죽어서까지 ‘용서받지 못한 살인자’로 기억되는 것을 못견뎌합니다. 피해자 부모님을 일일이 만나 용서를 구하려 부단히 애씁니다. 그리고 늘 조쉬에 대한 추억을 곱씹으며 하루하루를 보냅니다.
하지만 아버지인 샘은 아들의 죽음을 수더분하게 흘려 넘깁니다. 아니, 무감각한척 하느라 지독히도 애씁니다. 그런 사실은 원래 없었던 듯, 술로써 초연히 시간을 지나칩니다.
죽은 아들에 대한 샘의 태도를 보면 알베르 까뮈의 소설 <이방인>의 주인공 뫼르소가 떠오릅니다. 어머니의 죽음 앞에서조차 무덤덤했던 그의 마음속은 사실 부조리에 관한 투철한 갈등이 들끓고 있었습니다. 다소 괴팍한 인간으로 묘사되는 뫼르소는 오히려 이 세상 가치 사이의 간극에서 비롯되는 부조리를 꼬집습니다. 그의 슬픔은 다만 눈물이라는 매개로 타인에게 비춰지지 않을 뿐이란 겁니다.
영화 속 샘 또한 ‘가치’와 ‘이해’의 간극 속에서 애써 반응하지 않았을 뿐이라는 인상을 받습니다. 조쉬는 분명 총을 쏜 포악한 살인자였지만, 또한 샘의 사랑스러운 아들입니다. 포악과 사랑스러움의 간극이 바로 샘이 마주하기 싫은 현실이었단 겁니다.
그러나 샘은 아들의 죽음을 회피하려 하지도 않았고, 살인자라는 오명을 부정하려 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리고 누군가에게 호소하지도 않았습니다. 다만 가슴 한 구석에 못 박아 둔 아들을 노래를 통해 홀로 추억할 뿐입니다.
■ 가슴에 묻었던 아들을 토해내다
중요한 전환점을 계기로, 샘은 가슴 속 응어리를 표출하며 오열을 내뿜고 맙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차마 말하지 못한 사실을 적나라하게 들춰냅니다. 영화 막바지, 「Sing Along」을 부르기 전 샘은 자신의 아들이 살인자였다고 나지막하게 읊조립니다. 그의 말은 이해를 구하거나 용서를 호소하는 게 아니었습니다. 그 어떤 변증법이나 논리도 가미되지 않았습니다.
“내겐 아들이 있었고 그런 일을 있었지만 그럼에도 그는 내 아들입니다.”
“아들아, 지금 이곳에서 나와 같이 노래를 부르지 않겠니?”
그는 아무런 말도 하고 싶지 않았을 것입니다. 여전히 망각의 해로에 한없이 허우적대는 철없는 인간일 뿐입니다. 하지만 그 불안한 정신에서조차 옹골차게 들어선 하나의 메시지가 있습니다.
‘자식을 향한 부모의 사랑은 초월적이다’
아무런 대가나 인과가 없는 아가페는 바로 부모의 사랑에서 찾을 수 있고, 그 초월적 사랑은 부모 된 자 외에는 결코 깨달을 수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sing along’